어머니의 선물
아침 저녁으로 소슬한 가을의 냉기가 느껴지고 나뭇잎이 울긋불긋 나무에 곱게 단풍이 물들무렵 어느날 학교 방과후에 집에 돌아오니 웬 낯선 젊고 예쁜 아줌마 한분이 와 있었다. 그런데 할머니의 표정이 밝지 않으시고 역정이 난 표정을 짖고 계셨다.
낯선 아줌마에게 꾸짖는 듯한 어투의 말씀을 하시는 것을 얼핏 대문을 들어서다 들었는데, '학교 잘 다녀왔습니다.'하고 인사를 하자, 하시던 말씀을 뚝 끊으시고 낮선 아줌마를 가리키며 하시는 말씀이' 이분이 친척 아줌마 뻘 되시는 분인데 인사 여쭤라' 하신다.
내가 그 낯선 아줌마에게 꾸벅 인사를 하자 낯선 아줌마는 뚫어져라 나를 쳐다 보더니 눈에 눈물이 끌썽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영문을 모른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할머니께서는 '어서 들어가서 책가방 들여놓고 세수하고 씻어야지 뭐하고 있니!'하는 말씀에 방으로 들어갔으나 궁금증이 들었다.
그런데 마루에는 웬 옷이 있었는데 보기에도 좋은 옷으로 보였다.나중에 안 것이지만 그 옷은 고급 스웨터와 소위 '크린 사지' 바지였다.
중학교 때 삼촌으로 부터 들은 얘기였지만 그 때 찾아왔던 낯선 아줌마는 나의 이모였다. 그리고 스웨터와 크린사지는 어머니가 보낸 선물이었다. 날씨가 추워지니 아들 생각이 나신 모양이었다. 그당시 스웨터와 '크린 사지' 쓰봉(바지, 일본어)은 부잣집 아이들이 입는 고급옷이었다.
그당시 1950년대 중반이니 물자가 귀하고 세끼 밥먹기도 힘든 시절이었다.육이오 직후라 소위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양키물건'이 암거래 되던 시절인데 옷가지도 미군이 입던 군복중에서도 겨울철에 입는 정복에 속하는 '크린사지'는 그나마 부잣집 아니면 만져보지도 못하는 고급 옷이었다.
옷중에도 값나가는 비싼옷이라는 것을 먼훗날 알게되었다., 나는 그 해 겨울부터 다음해 겨울을 나기까지 잘 입었는데 언젠가부터 그 옷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옷을 처음 입었을 때가 국민학교(초등학교) 2학년 때이고 3학년까지 입었던 것이다. 할머님께서 일년 정도 지나자 하나밖에 없는 장손이 어머니 생각할 것을 염려하여 옷을 나무 불때는 아궁이에 집어넣어 불살라 버린 것을 내가 나이가 좀더 들고나서 알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사춘기가 되었을 무렵 알게된 것이지만 어머니는 이미 박씨 가문에 재취(재혼)로 가서 사시면서 그래도 두고간 아들이 생각나서 직접 올 수 없는 형편이지만 이모를 시켜 아들에게 처음으로 옷을 장만하여 보내신 것이었다. 아버님께서 세살 때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그당시 연세가 23세이시니 요즘 나이로 치면 학교 다닐 연세가 아닌가...!
그 당시 아버지 세대는 지금보다는 조혼이 관행이었고 당연한 것이었다. 내가 4살 되기 전에 어머니와 나는 헤어졌다. 그것은 할머니 연세가 당시 48세셨는데 이화학당을 나온 신식여성이셨다.당신의 며느리와 장손인 손자의 앞날을 생각하여, 어머니의 새로운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 강제로 떠나보내셨다.
할머님은 젖이 덜 떨어진 나를 홍합죽을 끓여 먹이며 나를 키우셨다. 할머님은 어머니와 내가 정이 들기전에 일찌감치 떼어놓는 결단을 내리셨던 것이다.
어머니께서 나 하나 낳으시고 생이별한 까닭에 외갓집하고의 인연도 끊어졌다. 그래서 선물을 전해줬던 이모도 이모부도 이종사촌도 외삼촌도 외사촌도 왕래가 없었다.
나는 조부모님 슬하에서 남부럽지 않게 유복하게 자랐다. 그러나 사춘기가 되자 나는 왜 부모가 안 계실까 의구심이 들고알고 싶어지다 보니 친척과 마을의 이웃집 어른들을 통해서 그 이유를 차차 알게되었다.
내가 얼마나 외로운 사람인가 하고 느낀 것은 고등학교 다닐 때 할아버님 돌아가시고 할머님 노쇠하시어 대화 상대가 부족하다고 느끼면서부터였다.
할머님께서는 손자가 어머니에 대한 환상이나 그리움을 갖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셨다. 그것은 손자의 앞날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 연유를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 알게되었다. 손자의 불행을 막기위해서였다.
어머니를 처음 뵈었을 때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해병대에 입대하여 훈련소에 입소했는데 일요일마다 훈련소에 면회오는 전우들의 부모님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어 몇번이나 어머니께 면회 와 주시길 기대하는 편지를 썼다가 찢고 썼다가 찢고 하다가 그여코 편지를 어머니께 부쳤다.
어머니께서는 사정이 있어 면회를 못가니 미안하구나...!하는 답장을 보내오셨다. 나에게는 한동안 마음의 상처가 되었다. 나는 그 편지를 발기 발기 찢어버리고 다시는 어머니께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그후 어머니를 잊으려 애쓰다보니 아무리 가까운 인연도, 기막힌 사연도 세월이 약이되어 잊을 수 있다는 사실을 터득하였다.
군대생활 하면서 친구 외에는 가족이 편지 보내오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편지함을 뒤져봐도 나한테 온 가족의 편지가 없을 때 느끼는 허허로운 마음... 다른 전우들이 부모님으로부터 편지 받고, 편지 쓰는 모습이 그렇게 부러울수가 없었다.
나에겐 띄울래야 띄울 수 없는 마음의 편지 사연은 늘어만 갔다. 나만의 부모님에 대한 띄울 수 없는 사연은 허공에 날려보낼 수 밖에 없었다.
어머니와 나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지금도 대한민국 같은 하늘아래 살고 있어도 지척이 천리라는 말처럼 너무도 멀리계신 어머니!
건널 수 없는 세월의 강과 전생의 업보가 저와 어머니 사이를 갈라놓고 있군요!
낙엽이 지는 가을이 되면 어머니가 이모를 통해서 보내신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
스웨터와 '크린사지' 옷이 생각납니다.
어머니 올해 춘추가 84세!
부디 오래 오래 사시고 만수무강 하십시요...!
이글은 용인시청 홈페이지 시민시장실 말과글중에 수록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