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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미디어

“30여 년 발품 팔아 찾아낸 봉화” 옛 이동통신 봉수


30여 년 동안 산으로 출근한 인문학의 보고 한 권의 책으로
국내 최초 우리나라 봉수 218개소 실태조사
2014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출판콘텐츠 선정도서
 

도서출판 강이에서 “우리 터 우리 혼, 오늘도 팔도가 무사하다 봉화가 전해 주네”라는 타이틀로 신간도서 ‘옛 이동통신 봉수’를 출간했다.

광복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정부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조사가 이뤄진 적이 없었던 우리나라 봉수가 한 권의 책으로 나온 것이다. 지난 30여 년 동안 최전방 DMZ의 도라산봉수에서 제주도 오소포연대까지 전국의 봉수대가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발로 뛰며 찾아다닌 결과물이다.

 

삼국시대부터 조선말까지 국가안위를 책임졌던 우리나라 봉수는 현재 얼마나 남아 있을까? 『옛 이동통신 봉수』에는 우리나라 봉수 218개소 중 멸실된 곳 7개소를 제외한 현존하는 211개소와 봉수의 시원지로 알려진 진해 망산도비문 1개소가 국내 최초로 공개된다. 이 중에서 유적상태가 절반정도 보존된 곳은 61개소, 담장만 남은 곳이 79개소, 복원된 곳은 71개소다.

 

이 책의 저자인 최진연(61) 데일리안 관방유적 전문 기자는 카메라에 담은 봉수대 사진 400컷과 역사자료, 주변 환경 등을 토대로 소상하게 정리한 내용을 인문학적 깊이와 형식으로 책에 담았다.

우리나라 봉수는 시기적으로 약간씩 차이가 있으나, 조선말에 편찬된「증보문헌비고」에는 남북한 통틀어 676개소가 축조됐다고 한다. 하지만 문헌에 없는 것까지 합하면 얼마가 될지 알 수 없다. 


봉수전문 학자들에 따르면 한반도에는 남북한 통틀어 1,150여 기가 있으며, 북한에 650여 기, 남한에는 500여 기가 파악되고 있는데, 이중에서 400여 기는 지금까지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봉수는 산 정상에 축조돼 있기 때문에 실제로 조사하기란 여간 힘들고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한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 유실되거나 위치를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저자는 “무거운 카메라장비를 둘러메고 접근이 어려운 산봉우리를 찾아다니는 것은 고행의 연속이었다며, 알려지지 않은 봉수대는 등산로가 없어 톱으로 잡목을 헤쳐 가며 길을 냈다.”고 말했다.

 

또한 “생태보호 구역이 늘면서 남해와 서해안의 봉수 주변에는 뱀들의 출몰이 많아 소름이 끼칠 정도였으며, 특히 고흥반도가 한눈에 조망되는 봉수대에는 독사가 바글거렸고, 여수지역 도서(島嶼)인 안도봉수에서는 짚단만한 구렁이와 마주쳐 혼비백산(魂飛魄散)했던 일도 생생하다.”고 했다.


그리고 “비 내리는 산등성이에서 방향을 잃었다가 애써 찾아냈지만 유적이 멸실돼 어이없던 때, 험준한 계곡으로 몸을 싫어 나르던 자동차가 추락하는 사고도 있었다.”고도 덧붙였다.

 

봉수는 새천년시대가 열리면서 수난을 당했다. 특히 전망 좋은 봉수대는 해맞이 장소로 관광 상품화가 됐고, 지자체 이벤트 행사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일부 지역의 봉수는 천편일률적으로 복원돼 봉수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거나, 타 지역 봉수축제에 영향을 받아 마구잡이로 파헤쳐지기도 했다. 유적전문가가 없는 업체가 공사를 하면서 멀쩡하게 남아 있던 봉수가 사라지는 안타까운 일도 있다.

 

반면에 경북 영덕군 오지의 대리마을은 옛부터 매년 사월초파일이면 주민들이 봉수에 올라가 천신에게 고사를 지내며 마을전체가 공동체의 일원임을 다지는 제사를 이어가고 있다.


최근 들어 역사향기를 맡으면서 산행을 즐기는 사람들이 부쩍 늘고 있다. 마음의 치유를 위해 자연속의 힐링, 트레킹 명소로 봉수대가 국민들에게 인기를 끌자 정부차원에서도 세계유산등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최첨단의 무기가 범람하는 이 시대에 연기와 횃불을 보내던 고대통신인 봉수의 존재는 이제 무의미해졌지만 목숨 걸고 지켜준 옛 군인들의 예지(銳智)가 번뜩이던 거화선은 산등성이에 홀로남아 자신을 찾아줄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곳에는 지금 산불감시초소가 세워져 세월의 무상함을 더해 준다.

저자는 “전국에 산재한 봉수를 연차적으로 조사해 원형이 잘 보존된 유적을 우선 선별해 숲길 따라 등산로를 개설하고 봉수주변의 잡목을 벌채한 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면 국가브랜드를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 된다.”고 밝혔다.

 

그는 30여 년간 전국의 관방유적만 전문으로 찍어 국내서 독보적인 사진·동영상 자료를 확보하고 있다. 그동안 그가 펴낸 책으로는「경기도산성 여행」「우리 터. 우리 혼 남한산성」「수원화성 긴 여정」「옛 다리, 내마음속의 풍경」 등 10여 권이 있다.


황혼 무렵 나그네의 시선은 남산에 멎게 된다. 어둠 속에 묻힌 산은 마법에서 풀린 듯 갑자기 꼭대기에서 별 네 개를 토해 낸다. 산봉우리에서 반짝이는 별 네 개를 볼 때면 자신도 모르게 어떤 전율을 느끼리라. 다른 세상에서 오는 빛이라고 생각될 만큼 타오르는 빛은 실은 별이 아니다. 봉화다. 모든 일이 잘돼 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용 횃불이다.


봉화는 꼭 위험을 경고하는 것만 아니다. 평상시 조선 전역의 만사가 평화롭다는 신호로도 사용된다. 각 지방에서 올라오는 전갈들을 서울에 알리기 위해 약 15분 정도 타오르다가 다시 어둠속으로 사라져 간다. 목멱산봉수는 전국 방방곡곡에 뻗쳐 있는 봉화들의 집결지로서 소위 횃불 전신술의 마지막 지점이다.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의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별첨1 최진연 작가 프로필


30여 년간 산천을 떠돌며 버려진 성곽, 봉수, 옛 다리 등을 찾아 사진과 글로 담아내고 있다. 1987년 ‘대한민국사진대전’ 대상과 ‘한국사진문화상’을 수상하고 옛 다리와 관방유적 등을 주제로 한 사진전을 15차례 이상 열었다. 이를 통해 우리 터, 우리 혼을 보호하고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해 왔다.

 

2000년에는 여군들의 병영 생활을 다룬 사진전 ‘한국 여군 24시’를 일본 도쿄에서 개최해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대한사진예술가협회장, 대한뉴스 화보 사진부장을 거쳐 지금은 데일리안 문화유적 전문기자로 일하고 있다.

펴낸 책으로는 《역사의 흔적 경기도 산성 여행》, 《수원화성 긴 여정》, 《우리 터 우리 혼 남한산성》, 《마음이 머무는 풍경》, 《옛 다리, 내마음속의 풍경》, 《여군 24시》, 《조선왕릉 잠들지 못하는 역사》, 《우리아이 첫 한양도성 여행》, 《우리아이 첫 남한산성 여행》, 《우리아이 첫 조선왕릉 여행》 등이 있다.


◎별첨2 책 속으로

 

▶봉화는 꼭 위험을 경고하는 것만은 아니다. 평상시 조선 전역을 통해 만사가 평화롭다는 신호로도 사용된다. 각 지방에서 올라오는 전갈들을 서울 장안에 알리기 위해 약 15분 정도 타오르다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져간다. 남산봉수는 전국 방방곡곡에 뻗쳐 있는 봉화들의 집결지로서 소위 횃불 전신술의 마지막 지점이다.

 

▶강화는 섬 전체가 항전의 요새다. 성곽 13개소, 진과 보가 12개소, 돈대 54개소, 봉수와 요망대는 15개소나 된다. 지금까지 확인된 관방유적만 94개소이며, 앞으로 얼마가 더 나올지 알 수가 없다. 국내에서가장 많은 유적이 강화도에만 집중 쌓인 것은 밀물과 썰물의 차가 심한 서해안에서 큰 배가 다닐 수 있는 곳이 강화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한강이 강화에 접해 있어 삼국시대부터 군사들의 이동수단으로는 요충지에 해당되었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수원화성에는 우리나라 봉수 중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봉수가 있다. 우선 위치로 볼 때 대부분의 봉수가 산봉우리에 있는데 비해 화성봉돈은 평지에 축조되어 있다. 이름도 봉수가 아닌 봉돈으로 부른다. 이는 유사시에 봉홧불만 피우는 것이 아니라 돈대 기능도 겸했기 때문이다. 돈대는 성벽에 구멍을 내 대포를 쏠 수 있는 구조물이다.

 

▶1960년대의 인릉산 아래 사는 아이들은 서울이 보고 싶으면 봉화둑으로 올라갔다. 이곳에서는 남산과 한강철교가 빤히 보였다. 철교 위를 달리며 검은색 화통에서 뿜어져 나오는 흰 연기의 기관차는 아이들에게는 신기한 동심의 세계였다. 당시 아이들은 더 높은 곳에서 기차를 보기 위해 올라선 곳이 어른 키보다 높은 봉홧불을 피우던 돌무더기였다.

 

▶조선시대에는 봉수 주변에서 제사나 무속 행위를 하는 것을 법으로 엄격하게 다스렸다. 푯대를 세워 백 걸음 안에서 거짓 봉화나 방화가 일어나면 관할 병조에서 단속하고, 백 걸음 밖이면 해당 진영에서 단속하게 했는데 위법자는 사형에 처했다. 인근 마을 사람들이 봉수에서 제사를 지내는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지만 조선 후기 봉수제도가 사라지고 나라가 쇠퇴기에 접어들 때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한 장의 사진은 어떤 글보다 강하다. 국적과 언어가 달라도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도구 중 사진만큼 큰 매력덩어리가 없다. 사진은 또한 잃어버린 옛 향수를 들춰내기도 한다. 천년 역사를 지켜 온 조상들의 혼이 서린 호국간성(護國干城) 봉수가 어느 날 멸실됐다. 25년 전 필자가 찍은 한 장의 사진만 홀로 남아 봉수를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 화제가 되고 있다.

 

▶근대화의 물결로 봉수 제도가 사라지고 봉홧불이 멈춰 버리자, 봉수군들은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채 마땅히 갈 곳조차 없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이들은 쓰러져가는 봉수가옥에서 홀로 지내다 생을 마칠 수밖에 없었고, 죽은 뒤엔 그 터에 묻히기도 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봉수 주변의 원주민들은 정월대보름이나 사월초파일 전후가 되면 봉화제·고사·별신제 등을 지내는 곳도 생기게 되었다. 정성으로 제사지내면 천신이 마을을 지켜 준다는 믿음 때문이다.

 

▶최첨단 통신문화를 접하고 있는 이 시대에 봉수의 존재는 마치 전설 속 얘기로만 들릴 뿐, 힘겨웠던 봉수군들의 생활은 누구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연기나 횃불 전달이 어려울 때 그들은 북과 나팔로 산 아래 위치한 진·보에 급보를 알렸으며, 어떤 때는 봉수군이 직접 다음 봉수까지 말을 타고 달려가서 알리기도 했다. 봉수군은 고독한 직책이었다. 횃불이 꺼지는 날은 일백 대의 매를 맞거나 심하면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횃불이 풍우에 꺼지지 않도록 산속을 헤매며 늑대 똥과 솔잎 등을 채취해 연료를 만들어야만 했다. 통신수단이 없었던 시절 봉홧불로 호국을 생각했던 조상들의 혜안이 참으로 존경스럽다.

 

▶우리의 산은 참 묘하다. 뒷동산에서부터 민족의 영산 백두산까지 산은 우리 민족과 친근한 존재다. 도적 떼나 산짐승이 나타나는 등 민심이 흉흉해지면 산신이 있어 우리를 지켜주었고, 전란이 터지면 산으로 들어가 후일을 도모하거나 결사로 항전했다. 오천 년의 역사를 통틀어 산성과 봉수만큼 우리 민족의 환희와 비애를 깊이 새기고 있는 곳은 없을 것이다. 우리네 산은 그 자체가 역사다.

 

▶경칩이 지난 어느 봄날 자정, 해안에서 검은 물체들이 움직였다. 봉수에서 경계를 서던 봉수군의 두 눈이 번뜩거렸다. 물체를 발견한 봉수군은 옆에서 졸고 있는 동료 봉수군을 흔들었다. 잠결에 눈을 부비며 앞을 내다 본 동료 봉수군의 눈도 동그래졌다. “헉! 적선이다.” 긴장한 봉수군은 재빠르게 봉수에 불을 붙였다. 까만 밤하늘을 뚫고 횃불이 피어올랐다. 가내포봉수에서 시작된 봉화는 순식간에 이웃의 가화봉수로 전달되었다.

 

◎별첨3 출판사 서평

 

험한 산봉우리 우뚝 솟은 봉수 찾아 DMZ에서 제주도까지


이 책에는 남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것, 쉽게 담아낼 수 없는 것들에 깊은 애정을 갖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빈 저자가 발로 뛰며 찾아낸 218기의 봉수 사진과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무거운 카메라 장비를 둘러메고 접근이 어려운 산봉우리를 찾아다니는 것은 고행의 연속이었다.

 

 등산로가 없어 연장으로 잡목을 쳐내며 길을 뚫고 찾아갔는가 하면, 봉수대에서 짚단만한 구렁이와 마주쳐 혼비백산하기도 했다. 비 내리는 산등성이에서 방향을 잃고 애써 찾아낸 봉수가 멸실되어 허탈해하기도 하고, 험준한 계곡으로 부지런히 몸을 실어나르던 자동차가 추락하는 아찔한 사고도 겪었다.

 

그러한 피와 땀의 결실로 탄생한 이 책이 봉수의 존재가치에 대한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의 올바른 인식과 봉수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활성화를 위한 기초자료로 활용된다면 그 이상의 보람은 없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여전히 사람의 손길을 그리워하는 전국의 봉수들


조선말에 편찬된 《증보문헌비고》에는 남북한 통틀어 1,150기의 봉수가 축조됐다고 전한다. 이 가운데 남한에는 현재 400여 기의 봉수는 흔적이 남아 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 유실되거나 인위적으로 파괴되고 말았다. 유적은 한 번 멸실되면 다시는 원형 복원이 어렵다는 사실도 외면한 채 천편일률적으로 복원해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봉수 앞에서 저자는 깊은 한숨을 토해낸다.

 

전망 좋은 봉수대는 해맞이 장소로 관광상품화됐고, 지방자치단체의 각종 이벤트로 몸살을 앓고 있다. 호국유적인 봉수대 터에 호화판 묘지가 조성된 예도 있다. 그런가 하면 예부터 지금까지 봉수대에 올라 산신에게 고사를 지내며 마을 전체의 안녕을 기원하는 곳이 있어 가슴 찡한 감동을 자아낸다. 과거의 통신수단인 봉수의 존재는 이제 무의미해졌지만, 봉수군들의 예지가 번뜩이던 거화선은 지금 산등성이에 홀로 남아 자신을 찾아줄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다.

 

호국 관광자원으로서의 가치를 지닌 봉수


저자는 전국에 산재한 봉수를 연차적으로 조사해 원형이 잘 보존된 유적을 우선적으로 선별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것을 제안한다. 숲길 따라 등산로를 개설하고 봉수 주변의 잡목을 벌채한 후 역사 유적으로서 봉수를 재탄생시키자는 것이다. 봉수군들의 생활상을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 또한 훌륭한 콘텐츠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 봉화 올리기, 수마석 던지기 등 그 영역은 무궁무진하다. 옛것에 대한 향수와 무수한 이야기들로 가득한 호국유적 봉수가 일반인들에게 한 걸음 성큼 다가가는 데 이 책은 톡톡히 한몫을 해낸다.
 
고색창연한 올레길 걸으며 잃어버린 나를 찾는 제주도의 독특한 관방유적
한반도 최남단의 섬 제주도, 거친 바다에서 살아온 제주 사람들은 내륙과 또 다른 특성을 갖고 있다.

 

그들은 속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강인한 불굴의 개척정신으로 섬을 지켰으며, 외세에 물러설 수 없다는 임전무퇴의 각오로 섬 곳곳에 관방유적을 쌓았다. 적의 침입이 예상되는 해안에 진과 장성을 축성하고 내륙에는 읍성을 둘렀다. 그리고 봉수와 연대를 설치해 적선이 나타나면 신속하게 연기와 불을 피워 성과 진으로 그 정보를 알렸다.

 

요즘 힐링 열풍이 몰아치고 있다. 올레길 걷기 여행 중에서 연대 답사는 매력 덩어리다. 해안을 따라 이어진 연대는 들길, 산길, 오름길 사이에 접해 있다. 이곳에 가면 역사향기 가득한 제주의 옛적 풍경을 고스란히 만날 수 있다.


◎별첨4 옛 이동통신 봉수 차례

 

1장 묵묵히 역사의 현장을 지켜보다
    서울·인천·경기 지역의 봉수

2장 일출의 장관과 굽이치는 산세의 절경을 맛보다
     강원·대구·경북 지역의 봉수

3장 고갯마루에 올라 황금 들판을 바라보다
     충북 내륙 지역의 봉수

4장 서해안의 낙조를 바라보며 상념을 떨쳐내다
     충남·전북 지역의 봉수

5장 청량한 숲길을 걸으며 전설을 떠올리다
     부산·울산 지역의 봉수

6장 그림 같은 남해안의 풍광과 충무공의 충정을 가슴에 품다
     경남 해안과 도서 지역의 봉수

7장 사각거리는 억새풀을 밟으며 천혜의 비경을 내려다보다
     전남 해안과 도서 지역의 봉수

8장 고색창연한 올레길 걸으며 잃어버린 나를 찾다
     제주도의 연대들

9장 잡목 속에서 잊혀진, 그러나 여전히 빛나는
      그 외의 봉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