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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규시장 칼럼] 정암(靜庵) 조 광조가 계신다면

진리는 하늘로부터 비롯된 것이지만, 그 것을 실천하는 주체는 인간이다.

 

▲ 심곡서원에서 춘계향사에봉행하는 김학규시장

 

 

지난 주 초에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에 소재 심곡서원에서 봉행된 춘계 향사에 초헌관으로 참례하는 광영을 누렸다.유도회(儒道會)에서 주관하는 심곡서원 에 시장에 취임한 후 한 번도 빠짐없이 매년 참례하였다.

 


▲ 충열서원

용인시에는 고려 말 충절의 표상이며 성리학을 도입한 삼은(三隱)의 한 분이신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소와 위패를 모신 '충열서원'이 모현면에 소재한다. 상현동이나 모현면이나 성현이라고 할 때 어질 현(賢)자가 들어 있는 지명이 성현이 모셔져 있는 까닭에서 연유한다.

 

 

 

 

정암(靜庵) 조 광조(趙光祖) 선생은 조선조 성종 13년(1482) 8월 10일 한성부,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운동 18번지에서 부친 조원강(趙元綱)과 모친 여흥(驢興) 민씨(閔氏)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용인은 선산이 있어 선생의 선대와 정암 선생의 묘소가 있고 위패가 모셔진 '심곡서원(深谷書院)'이 있다. 심곡서원과 충렬서원은 대원군 섭정 당시 서원 철폐
령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은 서원으로서 유명하다.

 


정암 선생은 17세 되던 해에 당사 학덕이 높아 세상 사람으로부터 추앙 받던 한훤당 김 굉필 선생의 문하에 제자로 들어가 수업하면서 학문을 닦게 된다.

 

 

-정암 선생은 29세에 진사시에 장원 합격한 후 34세에 알성시에 제1인자로 장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제수 받고 중종 임금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사헌부 감찰, 홍문관부제학, 사헌부 대사헌을 지내고 사후에는 선조 때 신원되어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정공이다. 문정중학교는 바로 문정공의 시호에서 비롯되었다.

 

 

정암 선생은 정치는 모름지기 근본을 바로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며 정치를 펴가는 그 근본은 바로 도(道)이고, 도는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며, 도를 행하는 요체는 정성스러움(誠)이 구체적인 덕목이라는 주장을 폈다. 정치의 목적은 하늘의 도리를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도리는 내 마음을 성실하게 하는 것이며 사람의 마음 안에 하늘의 도리, 즉 진리의 표준이 내재하니 그것을 잘 발현하여야 한다는 논리다.

 

 

 진리는 하늘로부터 비롯된 것이지만,
그 것을 실천하는 주체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도(道)-심(心)-성(誠)이라는 세 가지 기본 덕목이 유기적인 원리로 작동될 때 이상 정치를 향한 치자의 입덕(立德)은 온전해 진다는 상언(上言)이었다. 하늘(天)과 사람(人)과 마음(心)의 완전한 합일이 왕도정치(王道政治)의 근본이라는 참으로 간이(簡易)하면서도 중요한 제안이었다. 이것은 참다운 정치란 모름지기 위정자(爲政者)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이상의 표현이다.

 


먼저 정치 지도자가 이룩하고자 하는 큰 정치의 목표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위정자들이 그러한 가치를 이룩하기 위하여 자신을 충실히 수양하면서 노력할 때 요순과 같은 이상정치는 우리 현실에서도 충분히 실현될 수 있다는 주장이었던 것이다.- 조광조/이상성/성균대출판부-

 

 

개혁정치를 실현하고 군왕은 인격 완성을 통해 도학정치를 펴나가야 된다는 주창과 함께 젊은 사림파의 영수가 되어 개혁에 앞장서면서부터 기득권을 누리던 '훈구파'의 반발을 사게 되고 훈구파의 술수와 모략에 의해 발생된 기묘사화(1519)에 많은 선비들이 억울하게 희생되면서 정암 선생께서도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치게 된다.

 

 

정암 선생은 전라도 화순군 능주로 유배를 갔다가 사약을 받고 돌아 가셨다. 당시 선생을 숭배하던 제자인 학포 양 팽손 선생은 심곡서원에 함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정암 선생은 임금이 보낸 독약 사발을 마시기 전에 절명시(絶命詩)를 다음과 같이 남겼다.


愛君如愛父(여군여애부);임금 사랑하기를 어버이 사랑하듯 하였고
憂國如憂家(우국여우가);나라 걱정하기를 집안 걱정하듯 하였노라
白日臨下土(백일임하토);밝은 해가 이 세상을 내리 비추니
昭昭照丹衷(소소조단충);거짓 없는 나의 마음을 훤히 밝혀주리라

 

 

정암 선생은 젊은 나이에 기세하였지만 도학사상과 학문, 도학군자로서의 고매한 인격과 학덕은 시공을 뛰어 넘어 천추에 빛나며 우리 미족에게 '태산북두'로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약 오백년 전의 정암 선생께서 오늘의 우리 현실을 보신다면 어떻게 진단하고 개혁 방안을 제시할까 생각해본다. 몇 푼의 돈 때문에 패륜도 서슴치 않는 사회, 지식인은 많아도 지덕을 겸비한 인재가 드문 사회, 돈과 향락에 부패한 일부 계층 등...

 

 

오백 년전이나 현재나 개혁은 어려운 것같다.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다. 기득권을 가진 세력이 기득권을 내려 놓고 양보하지 않는 한 정치 개혁, 경제 개혁은 요원하다. 중종 반정으로 군왕을 옹립한 공신 세력의 저항에 의해 정암 선생의 개혁 의지는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지금은 어떤가...?

 

 

그 때나 지금이나 기득권층의 완강한 저항이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힘있고 가진 것이 많은 쪽에서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는 한 개혁은 한갖 공염불에 그칠 공산이 크다.

 

 

정암 선생의 도학 정치 사상이 그리운 소이가 흔탁한 오늘의 현실에 기인한다. 정암 선생이 계신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엄히 꾸중하실 것만 같다. 나만의 생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