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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조선 사대부, 명가의 유물로 만난다

7월 14일~9월 26일 경기도박물관서 특별전 열려

조선 사대부의 진솔한 모습 조명한 드문 기회

경기명가 기증 보물 11점 등 중요유물 200여점 전시

 “조선시대 사대부의 삶은 어땠을까?”

조선시대 사회 문화의 주류를 이끌었던 지식인과 벼슬아치로 기억되는 사대부들. 이들은 한평생 교육과 독서, 벼슬살이 속에서 자신의 삶의 목표와 가치관을 실현하고자 하는 드높은 기상을 지녔고 이러한 모습은 당시의 역사기록뿐만 아니라 명가(名家)에서 여러 대를 이어 보존해 온 유물에서도 생생하게 찾아볼 수가 있다. 

경기도박물관(관장 조유전)은 오는 7월 14일(수)부터 9월 26일(일)까지 유물기증 문중 및 박물관계, 학계, 문화예술계 관계자, 도민들을 초청해 이루어지는 개막식을 시작으로, 경기명가의 기증유물을 통해 조선시대 사대부를 조명하는 특별전시회를 마련한다고 밝혔다.

경기도박물관은 1996년 개관 이전부터 현재까지 경기도의 명문집안으로부터 조선시대의 사회와 사대부의 생활상을 규명할 수 있는 각종 문서, 개인 문집, 초상화와 그림, 장신구, 복식 등 여러 분야에 걸친 귀중한 유물을 기증받았다.

이들 집안의 대부분은 선조의 유품을 보존하고 전승하는 것을 명가의 엄격한 덕목으로 여겨온 집안으로서, 이미 조선시대에 당대를 이끌고 가문을 빛낸 수많은 사대부를 배출해 명가를 이루어 왔다.

전시회는 도입부를 지나면 크게 세 부분의 흐름 속에서 관람할 수 있게 구성했다. 먼저 도입부에서는 31개 주요 명가와 보물 11점을 포함한 기증유물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으며, 특히 그간 박물관이 기증받은 유물의 보존에 힘쓰면서도 학계와 일반인을 위하여 이를 연구, 전시, 교육자료로 활용하여 이룩한 성과물을 전시한다.

 

도입부 다음의 첫 번째 이야기는 <고희를 넘긴 노신하를 위하여>이다. 조선시대 사대부가 공통적으로 가슴에 간직한 꿈은 높은 벼슬을 거쳐 영화로운 노년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여기서는 이러한 단계를 밟아 사대부가 노년에 임금으로부터 나라의 원로로 인정받는 과정에서 받아 간직해 온 대표적인 유물을 소개하고 있다. 즉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의자와 지팡이인 궤장(?杖), 그리고 임금이 베푸는 잔치장면 및 축하의 글과 그림을 담은 유물이 그것이다.

 

전시의 두 번째 이야기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이다. 왜 사대부는 평생을 쉼 없이 이 실천적 덕목을 현실에서 행하고자 했을까. 우리가 막연하게 알아 왔던 것에 대한 보다 명쾌한 답을 사대부의 자기수양, 과거준비와 합격, 벼슬살이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오래전의 그들에게서 오늘날 우리사회의 입시전쟁과 일맥상통하는 긴장과 경쟁의 치열한 숨결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삶에서 좁게는 가문의 영광이, 넓게는 세상의 경영이 중요한 목표였다. 과거합격증, 각종 명령서, 월급명세서, 관청의 발급문서, 관직일기, 남편의 벼슬과 덕행에 따라 팔자가 정해지는 부인들에 관한 유물들로 구성했다.

전시의 세 번째 이야기는 관혼상제와 교유관계에서 살펴 본 <사대부의 일생>이다. 조선시대 사대부는 사회교화의 차원에서 유교적 주자가례의 보급에 애를 썼으며, 이에 따라 일상에서 효 사상을 표현하는 관례, 혼례, 제례, 상례의 실천을 중요하게 여겼다. 자연히 여러 명가들에서는 거의 공통적으로 여기에 관련된 예법서를 비롯해 상제례 문서들, 분재기 문서, 초상화 등을 잘 보존해 오고 있다. 

 이외에도 풍류와 교유(交遊), 임금에서부터 주변의 지인들에 이르기까지 서로 주고받은 글, 그림, 편지글 등이 소개되며, 이를 통해 사대부의 생활의 깊은 속을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회의 세 가지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조선시대 사대부는 내적으로 자신을 수양하고 백성을 다스림으로써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신념을 가진 지성인들이었다.

이들은 오래 전의 주인공이었으나, 생전에 보여준 삶의 목표와 가치관은 오늘날까지 전해져 명가의 정신을 이루고 있는 측면이 많다. 이번 전시회는 사대부가 지닌 근엄한 면뿐만 아니라 오밀조밀한 삶을 엮어가는 면까지 그들을 가까이서 느껴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특별전 주요 전시품 설명

 

궤장(几杖) (1668, 의자높이 91cm, 지팡이 길이 190cm,  전주이씨 백헌상공 종중, 보물

 

조선시대에 당상관 정2품 이상의 관원으로서 나이 70세가 되면 벼슬에서 물러나는 것을 허락했는데, 나이 70세가 넘고서도 정사 때문에 치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 중에서도 정1품 관에게는 임금이 특별히 의자와 지팡이[궤장]를 하사했다.

 

이경석은 1664년 기로소에 들어갔고 74세 때인 1668년(현종 9)에는 신하로서 최고 영예인 궤장을 하사받았다. <<백헌집>> <사궤장식감록>에 의하면 이경석은 이러한 영광을 기리기 위하여 조정의 모든 공경대부를 궤장연에 초대하여 서로 시문으로 축하의 마음을 표했다고 한다. 의자는 고대의 궤라는 주례(周禮)의 의식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 필요시 펼 수 있으며, 앉는 곳은 노끈을 x형으로 엮었다.

 

이중로초상(李重老肖像)

     (17세기, 94 × 169, 청해이씨 세마공파 종중, 보물 제1174호)

   이중로(1577~1624)는 조선의 개국공신 이지란의 후손으로 1623년 인조반정에 참가한 공로로 정사공신 2등에 책록되어 청흥군으로 봉해졌다. 이 초상화는 당시에 그려진 공신 도상으로 오사모에 단령을 착용하고 두 손을 모으고 교의자에 앉은 좌안칠분면 전신의좌상이다. 안면처리는 이마와 콧등, 광대뼈 부근처럼 도드라진 곳을 더 강하고 붉게 칠해서 요철감을 나타내는 역명암법을 사용하여 준수하고 날렵하게 표현했다. 조선 중기 공신상의 새로운 경향을 제시한 예시적인 작품으로 그 의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2002년에서 2003년에 걸쳐 보수 수리했다.

 


 

금오계첩(金吾契帖)

    (18세기 후반, 21.6 × 33cm, 청송심씨 온양공 응교공손)

    친목도모와 풍류를 즐기기 위해 1768년(정조 44) 9월 당시 금오계의 모임을 기록한 계첩이다. 당시 모임은 남산에 위치한 천우각(泉雨閣)에서 이루어졌다. 계회 장면을 그린 계회도와 참가자들의 당시의 이름, 자, 생년, 본관 등을 기록한 좌목과 함께 참석자들이 순서대로 시문을 지어 장첩했다. 명필로 이름이 높았던 조윤형(曺允亨 1725-1799)이 글씨를 쓰고, 진재 김윤겸(金允謙 1711~1775)과 원천(源泉)이라 수결한 화가가 각기 한 폭씩의 그림을 그렸다. 두 계회도에서 인물들은 주변경치를  감상하거나 담소를 나누는 모습으로 자연에 심취하여 시서화를 즐기는 문인들의 흥취를 잘 표현하고 있다.

 

 

이완(李浣)투구[冑]와 깃대

(17세기, 투구높이 28.6cm, 투구지름22cm, 경주이씨 국당공파 정익공 종중)

   효종 때 북벌을 주도한 이완(李浣)이 생전에 사용한 것으로 짐작되는 투구이다. 무쇠로 된 기본 투구 아래로 이마를 덮도록 무늬를 새긴 얇은 판을 둘렀다. 여기에는 금도금으로 테두리를 두르고 눈 부분을 반달형으로 팠다. 꼭대기에는 역시 금도금으로 화려하게 장식하고 술을 달 수 있는 대가 마련되었다. 깃대는 의전용으로 날 끝부분에 군기를 달기 위한 두 개의 구멍을 내었다. 창날은 단면이 삼각형이고, 한 면에 약간 오목하게 선을 만들고 금색을 칠했다.

 

삼작노리개[三作佩飾] (18세기, 길이 37cm, 용인이씨 판관공파 종중)

  밀화, 산호, 백옥, 진주 등으로 장식되어 있는 대삼작노리개이다. 밀화는 모란꽃 모양으로 양각되어 있고, 산호 가지는 금속 꽃받침과 연결되어 있으며, 백옥과 진주로 장식된 나비모양 노리개는 초록빛깔의 물총새 깃털로 화려함을 더했다. 이것을 보관하던 자주색과 남색의 보자기가 함께 전해진다. 사대부가의 부녀자들이 보관하거나 착용한 화려함이 돋보이는 장신구이다. 

 

 

 

정광경지석(鄭廣敬誌石)

     (17세기 말경, 15.5 × 20.8cm, 동래정씨 흥곡공파 종중)

   정광경(鄭廣敬 1586-1644)은 자가 공직(公直), 호는 추천(秋川)으로 좌의정 창연(昌衍)의 아들이다. 1612년(광해군4)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그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예조참의, 충청도관찰사, 대사헌, 대사간, 이조참판을 지냈다. 이 지석은 정광경 묘에서 나온 청화백자 지석으로 총 12점으로 되어 있다.  지석의 글은 갑인년(1674) 7월 김수항(金壽恒)이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지석의 유태가 매우 정선되어 매끄럽고 우유빛을 띄고 있으며, 청화안료는 짙은 검푸른 빛을 띄며 살짝 번짐을 보인다. 조선 후기 유행한 규격화된 지석의 크기와 사대부층의 청화안료의 사용을 고려하면 17세기 말경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