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과 여주를 잇는 협궤열차인 '수여선' 열차는 일제에 의해 1930년대 초에 부설된 철도이다. 일제 조선 총독부에서 여주, 이천 지방에서 생산되는 양질의 쌀을 비롯한 곡물과 용인 지방에 풍부한 임업 자원과 농산믈을 수탈하기 위해 놓은 철도였다.
그리고 용인군청도 교통 편의상 '김량장역'에서 가까운 위치(현 처인구청 자리)에 설치했다.
석탄을 때면서 증기로 추동력을 얻는 미니 증기 기관 열차였다. 선로(철로)인 레일의 폭이 일반 열차 보다 폭이 좁아 협궤 열차라고 불리웠다. 달릴 때는 굴뚝에서 흰 연기를 내 뿜으며 '칙칙 폭폭!' 하는 소리를 내며 달렸다. 빽...!하는 기적 소리가 굉장히 커서 철도 옆에 사는 집은 아이들을 많이 낳는다는 우스개 소리까지 있었다.
기관사 두 명이 한 조가 되어 한 사람은 연실 석탄을 화구에 집어 넣는 화부 역할을 하고 한 사람은 운전을 맡아 하는 방식이었다. 열차가 역사에 들어 올 때는 1백여 미터 지점에 시그널(신호등) 날개가 아래로 떨어져 빨간 불이 들어오면 통행하는 사람이 철로를 건너 다니지 못하고 기다렸다가 파란 불이 들어 온 뒤에 건널목을 지나다니는 방식이었다.
나는 수여선 열차를 타고 6년을 수원으로 학교 다니면서 통학하였다. 다른 교통 수단은 없던 시절이었다. 신갈에는 당시 교육기관이래야 신갈국민학교와 무인가 학교인 배성중학교 뿐이었다. 수원 아니면 용인으로 중학교를 시험 치러서 들어가던 시절이었고 학교 선택은 담임 선생이 성적 순으로 정해주었다.
통학하는 각 학교의 학생들은 모두가 친구가 되었다. 열차는 기관차 뒤에 화물칸 차량이 넷 내지 다섯 량 정도 달려 있고 맨 뒤에 두 량 정도 객차가 달려 있어 일반 승객은 객차에 탑승하고 학생들은 화물칸에 타고 다녔다. 화물칸에 학생들이 몰려 타기 때문에 장난을 치기 일쑤였다.
그리고 객차 칸은 어른에게 좌석을 양보해야 하기 때문에 화물칸이 편했다. 그리고 차장아저씨가 있어 학생들은 객차에 못 들어오게 했다. 그리고 승차권 대신 소위 패스(1개월 단위로 승차권을 발급받음)를 끊어 다니도록 되어 있는데 그나마 패스 끊으라고 집에서 돈을 타다 빵을 사먹는다든가 다른 데 써 버리고 몰래 타고 다니는 '쌔비차'를 타고 다니는 학생이 많았다. 내릴 때는 역에 도착하기 전에 느리게 달리는 지점에 오면 열차에서 뛰어내렸다.
화물칸에는 장사꾼들의 짐 보따리와 수확한 농산물을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 자루에 곡식을 담은 짐을 싣고 승차하는 농촌 사람 외에는 대부분 학생들 차지였다. 수여선 열차는 내리막길에을 내 달릴 때는 속도가 빨랐으나 오르막길은 속도가 워낙 느려 달음박질하는 속도보다 느린 경우가 많았고 화력이 떨어질 때는 오르막길을 넘지 못하고 뒤로 후진했다가 평지에서 화력을 충전하여 고갯길을 넘곤 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그래서 남학생들은 앞 칸에서 뒷 칸으로 , 뒷 칸에서 앞 칸으로 옮겨 다니며 까불기도 했다. 그리고 좋아하는 여학생이 있는 칸으로 옮겨 타기도 했다. 사고로 부상을 입는 경우도 있었다. 열차를 신갈역에서 타면 수원 화성(인계동)역에서 내릴 때까지 한 시간 이상 소요되었다.
수여선 열차는 많은 사연과 추억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학생들의 꿈이 서려 있었다. 그나마 수여선 열차를 타고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선택 받은 사람이었다.
'50년대에 국민(초등)학교 졸업하고 '60년대에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는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학생도 한 학급에 절반이 되지 못했다. 진학 못하는 학생들은 부모님의 농삿일을 돕거나 또는 이발, 봉제 기술 등을 배우고 여자들은 양재,편물, 미용 기술을 배우거나 해서 직업 전선에 뛰어 들었다.
수여선 열차가 사라진 것은 '70년대 초로 기억된다. 버스라는 교통 수단이 생기고 경부 고속도로가 생기는 등 교통이 발달하고 환경이 바뀌면서 수여선은 용도 폐기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안타까운 것은 철도 부지 마저 매각 처분되었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다. 다른 고장에선 관광 열차로 활용한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50년대 말 쯤 영업용 버스가 등장했을 때는 버스 앞 쪽이 툭 튀어 나온 구형 버스였다. 그리고 운전사 외에 조수와 안내양이 있었다. 조수는 운전사 옆 좌석에 타고 다니면서 버스가 정거했다가 출발할 때 시동이 자동으로 걸리지 않아 기억자 형 쇠막대 '레바'를 엔진에 꽂고 버스 앞에서 열심히 돌려야 시동이 걸리기 때문에 출발할 때마다 조수의 역할이 컸다.
레바를 앞에서 돌릴 때 운전사는 엑셀레이터를 밟고 있어야 시동이 걸리기 때문에 조수 없이는 자동차를 움직일 수 없었다. 화물 트럭도 마찬가지였다.
버스 안내양은 승객의 버스표를 확인 한 후 표를 수거하였다. 버스가 출발 할 때는 안내양은 문 닫힌 것을 확인 한 후 '오라, 잇!' 하고 힘껏 소리치면 버스가 출발하였다. 버스 안내양을 잘 사귀어서 표를 안 끊고 공짜로 타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버스 안내양은 당시 인기 직종이었다. 예쁜 유니폼에 빵 모자를 쓴 안내양들이 총각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어수룩하던 시절 얘기다.
지난 4월 26일 우여곡절 끝에 용인 경전철인 '용인에버라인'의 개통식이 있었다. 28일까지 무료 승차 기간이어서인지 탑승객 인원이 4만명이 넘었다는 보도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부터 유료 승차 기간이 시작되는 것이다.
경전철 개통에 따른 이면에 얽힌 이야기는 이 다음에 별도로 기록으로 남길 생각이다. 나로서는 감회가 남달리 깊을 수 밖에 없다.
용인시장으로 취임한 이래 가장 큰 현안인 경전철 문제로 해법을 찾기 위해 많은 고뇌가 있었다. 시민이 안전하게 이용해야 하는 '안전성 확보가 첫째요, 다음은 시민이 낸 세금으로 형성된 재정의 손실을 최소화 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원칙이며 지금도 변함없다.
개통되기 까지 억울한 소리와 공격도 많이 당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진실은 세월이 가면 반드시 밝혀진다는 신념으로 일희 일비하지 않기로 했다. 역사는 후세의 사가가 평가한다고 했던가...
오늘 비가 와서 탑승객이 적었던 것같다. 벌써 9시 뉴스에 승객이 적게 타서 우려 된다는 보도도 있었다. 국철도 첫해에 흑자가 났다는 얘기 들어 본 적이 없다. 참고 기다리며 지켜보는 사회의 분위기가 아쉽다. 모두가 조급하고 남의 흠집 내기 바쁜 사회 분위기가 세상을 더욱 삭막하게 하는 것같다.
50년 전의 석탄 불 때서 증기의 힘으로 달리던 열차가 지금은 전기로 가는 무인 시스템 전동차로 바뀌었다. 격세지감을 느낀다. 오늘 퇴청하는 길에 시청역에서 탑승하였다. 어제까지 무료 탑승이었으나 영업운행이 개시되는 첫날인 것이다. 오전에는 비가 내려 승객이 별로 없었던 것같다. 교통카드를 마련해서 처음으로 '용인에버라인'을 카드를 이용해서 탑승한 것이다.
탑승해서 보니 10여명의 승객이 있었다. 옆 자리에 젊은 엄마와 어린 여자 아이가 타고 있었다. 꼬마에게 나이를 물어보니 다섯 살이라고 했다. 달리는 차창 바깥 경치 구경하는 것이 신기한 듯 달리는 차창 밖을 내다보며 엄마에게 연신 질문을 했다. 그리고 엄마에게 묻기를 이 차는 왜 운전사와 운전대가 없느냐고 한다. 나는 엄마 대신 이 전동차는 운전사 없이 관제소에서 컴퓨터로 조종하기 때문에 운전사 없이 다니는 전동차라고 설명해 주었으나 꼬마가 알아 들었는지 모르겠다.
달리는 전동차 바깥으로 바라다 보이는 풍경이 아름답다. 승용차나 버스에서는 볼 수 없는 경치다. 아파트 위로 펼쳐진 푸른 하늘과 경계를 이루는 스카이라인, 산과 들이 펼쳐진 숲이 보이고 마을과 하천이 보인다.향후 일 년 안에 반드시 용인의 명물 '용인에버라인'이 되어 누구나 타보고 싶은 전철이 되도록 활성화에 총력을 기울일 것이다.
고유가 시대에 짧은 거리는 이제 '용인에버라인'을 이용하여 아황산가스 배출도 줄여 환경정화와 주차난도 해소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도록 용인시청 2천여 공무원부터 솔선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해본다.